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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성모 승천 대축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큰일을 바라봅니다.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 영광에 들어 올림을 받으신 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성모 승천은 인간의 참된 위대함이 우리의 힘과 능력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와 사랑 안에 있음을 밝혀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난과 피난의 고통을 겪으셨고,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죽음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시고 엘리사벳에게 서둘러 찾아가셨으며, 아드님의 곁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은 성모님께서 온 생애로 드러내신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위대함은 고통이 없었던 데 있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데 있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오늘 우리가 인간의 가치를 무엇으로 판단하는지도 되묻게 합니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는 요즘, 사람의 가치를 능력과 효율만으로 재단하려는 유혹도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성모님 안에서 이루신 큰일은 인간의 존엄이 능력이나 성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레오 14세 교황님께서 첫 회칙 〈Magnifica Humanitas〉에서 일깨우시듯, AI를 비롯한 과학기술이 삶을 크게 바꾸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만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존엄과 공동선에 어떻게 이바지해야 하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청년, 노인과 병든 이, 성소수자와 가난한 이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인공지능이 더 많은 일을 대신하는 시대일수록, 기술이 약한 이들을 돕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깊게 하는 데 쓰이는지 세심히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기술의 혜택이 일부에게만 머물러 새로운 소외와 불평등을 낳고 있지는 않은지도 함께 돌아볼 일입니다.

무엇보다 질병과 실패, 관계의 상처와 이별을 겪는 이들의 곁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고통 없는 삶을 보장하지 않지만, 어떠한 고통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희망을 품게 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결함으로만 여기면 고통받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생명을 덜 소중히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힘쓰되, 생명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성모 승천은 연약한 우리의 몸과 삶도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그분의 은총 안에서 온전히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개인의 생명을 돌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관계를 치유하는 일로 이어져야 합니다. 분열과 대립이 깊어지는 우리 사회와 민족의 현실에서도 서로를 존중하며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열어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과 함께 광복절도 기념합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을 기억하며, 분단과 적대의 상처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광복의 참뜻을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이어 가려면, 미움과 불신으로 갈라진 마음이 치유되고 서로를 향한 신뢰를 다시 깊게 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가 서로를 배척하는 말을 삼가고, 이해와 대화의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북녘의 모든 형제자매에게도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청합니다. 하루빨리 남과 북이 대화의 장에서 서로 마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모님께서는 불확실한 현실이 아직 달라지지 않았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이루실 구원을 믿고 노래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복되신 까닭은 모든 일을 미리 이해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큰일은 가장 약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우리의 작은 선택에서도 드러납니다.

특별히 다가오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며, 청년들이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세상 안에서 희망과 화해와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마음을 모아 동행합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살아갈 힘을 주시고 갈라진 마음을 치유하시어,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기쁨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https://aos.catholic.or.kr/bbs4334/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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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 인터뷰

조성진은 고유성에 대해 그것이 마치 보편적인 개념인 것처럼 말합니다. 예술가에게 있어 남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로 받아들여지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덧없는 세기에 살고 있어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잔여라는 것도 없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낡아빠진 것으로 취급되죠. 헤드라인을 읽고 나면 기사의 내용이나 정보조차 휘발 됩니다. 이것이 예술이 고유성을 잃어버린 이유이자 진정한 것을 찾기 어려워진 이유라고 생각해요. 고유의 존재를 잃은 세상에서, 고유성이 눈에 띄고 중요하게 된 이유이죠. 해석자(피아니스트)는 자신을 남들과 구별시키길 바라면 안되는 것 같아요. 해석자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야하죠. 우리는 글렌굴드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를 따라하려고 한다면 초장부터 실패할 거에요. 그것이 우리가 멈춰야 하는 이유에요. 찾는 것을 그만 해야해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좀 더 관찰해야죠.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것들을 찾아내야 하구요.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거에요.

독창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름다우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해설가의 아름다움은 그의 해석을 넘어서 음악 자체에 있지만 말입니다.

아름다움은 보편과 주관이라는 모순 속에 있어요. 예를 들어, 스타르보는 아름다운 곡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곡이 대단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어요. 대중들은 아름다움과 예술의 이분법을 이해해야 해요. 모든 예술이 아름다운 건 아니고,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그게 곧 최악인 건 아니거든요.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라벨의 레파토리는 절대 쇼팽의 녹턴과 같이 들리지는 않을거에요, 그렇지만 여전히 훌륭한 예술작품이죠. 예술가로서 저희의 의무는 이러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유로, 마드리드 공연에서는 야나첵과 쇼팽을 함께 프로그램에 넣었어요. 두 작품 모두 각기 다른 시각으로 세상의 미를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https://blog.naver.com/olivia5512/222562539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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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고독은 매우 위험합니다. 아주 중독적이에요. 어찌나 평화롭고 고요한지 그 사실을 알게되면 아예 버릇이 되버리죠. 그렇게 되면 이제 사람들 만나기가 싫어지는거에요. 내 에너지를 너무 빼앗기니까.

Solitude is dangerous. It’s very addictive. It becomes a habit after you realise how peaceful and calm it is. It’s like you don’t want to deal with people anymore because they drain your energy.

Jim Car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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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예전에 과학잡지에선가 읽은 나비 날개가 커다란 이유가 인상적이었다. 다 가누기 힘들 정도로 날개가 엄청 큰 덕에 계속 휘청거리고 자기 날갯짓에 생긴 바람(와류)에 휩쓸려 비틀거리면서 날기 때문에 새들이 나비의 궤도를 예측해서 잡는 게 엄청 힘들어져 생존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새들은 빠르게 나비를 잡기 위해 매끄러운 곡선(아마도 싸이클로이드)을 타고 내려와 나비의 궤도로 내려앉지만, 나비에게 궤도란 자기를 끌고 가는 가상일 뿐 실제로는 매순간 자기 궤도를 이탈하며 맴돌고 있기 때문에 나비는 생각보다 쉽게 잡히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비 날개가 커다란 이유”라기보단 “나비가 손쉬운 비행에 방해가 되는 뒷날개를 (진화의 과정 안에서) 여전히 지니고 있는 이유”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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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는 나를 대하는 법, 못해도 잘 사는 법 이게 왜 중요하냐면 살다보면 계속 배운다. 배움의 과정에서 ‘내가 제일 못한다’ 생각하는 기간이 매우 길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대하는지가 능력, 성과, 행복에 큰 영향을 준다. 난 그걸 배울 기회를 한번 놓쳤다.

난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고 책벌레라 어딜 가도 어른들이 혀를 내두르는 아이였다. 평생 그렇게 살다 미국 유학을 가니 바보가 된거다. 그때는 어려서 감정조절 능력도 부족했고, 결과주의적 부모님과 한국입시에 찌들어서 뭐든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내 바보같음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내 모든 걸 갈아넣어서 그걸 극복하는데 썼다. 내 영어는 처참했다. “May I go to the bathroom” 딱 한 문장만 말할 줄 알고, 교과서 한 면에 모르는 단어가 절반이고, 시험 답안이 맞아도 스펠링을 틀려서 오답처리가 됐다. 한 마디면 풀릴 오해를 못 풀어서 매일 호스트가족에게 혼나고

서럽고 답답하고, 내가 살던 시골마을에서는 누구도 내 문화와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가엽고 주눅든 작은 동양인 아이일 뿐. 누가 입에 재갈을 채운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영어공부로 풀었다.

밤늦게까지 단어를 찾아 외웠고, 교과서와 강의 슬라이드를 통째로 암기하고, 혼자 있을 때 연극하듯 그날 들은 사람들의 말을 따라하곤 했다. 울면서 공부한 날이 울지 않은 날보다 많았다. 그만큼 노력했고 운좋게 언어능력도 타고나서 결과도 좋았다.

어떤 사람을 이걸 미담으로 부른다. 그들에게 나는 좆까라고 하고 싶다. 난 그냥 정신적 상담이 필요한 마음이 아픈 아이였고 미국에서의 첫 1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하고 어두운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돌아가봤자 다른 종류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건 사담이니 건너뛰고.

난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됐었다. 누구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잘 해야 한다, 못 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과 강박이 내 10대와 20대 초반을 지배했다. 그렇게 남들보다 앞선 영어능력을 얻었지만, 10여년간 불안했다. 그때는 마음의 평화가 영어보다 천배는 소중하고 얻기 힘들다는걸 몰랐다.

왜냐면 모두가 내가 영어 잘하고 성적 좋은 아이이길 바랬지 행복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콩 심은데 콩 난거다. 근데 이건 어른도 마찬가지다. 어떤 국가도, 학교도, 회사도 최종목표는 개개인의 행복이 아니다. 그들에게 행복은 생산을 위한 윤활제일 뿐이다.

내가 영어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고 긍정하기 전에 영어를 잘 하게 돼버렸기 때문에 연습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그 후 뭐든 배울 때 틀렸다, 모른다에 초점 맞추고 스트레스 받고, 그 스트레스를 원천으로 날 갈아넣었기 때문에 훌륭한 일꾼, 학생이자 불행한 사람으로 살았다.

다행히 독어는 정신적으로 성숙했을 때 배웠고 천천히 늘고 있다. 난 영어에서 실패한걸 독어에서 바로잡으려고 하고 있다. 답답함, 무능에 대한 자기혐오, 남에게 멍청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일 거라는 공포. 이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고 장악하는 걸 연습하고 있다.

나는 나일 뿐이고, 독어를 못해도 충분한 사람이다. 난 친절한 눈빛과 미소를 가졌고, 말이 안 통해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난 한국어와 영어를 할 때 똑똑한 사람이고, 우연히 그들과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언어를 배운 것 뿐 우리는 모두 가치있는 사람이다.

난 하고 싶은 얘기가 있고, 돕고 싶은 사람들이 있고, 내 머릿속엔 내가 만든 우주가있다. 어떤 언어든 태초에 내 머릿속 밖에 있는 이와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언어는 배우면 된다. 나만 낼 수 있는 목소리를 찾는게 제일 어렵고 중요하다.

언어는 전달 도구일 뿐이다. 전달도구에 주눅들어서 목소리를 잃는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언젠가 필요한 이에게 닿을 거다. 언어 잘 하는 사람은 많다.하지만 세상엔 분명 나만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다. 그걸 찾으면 언어는 따라올거다.

노력하는 사람 멋있고 능력 좋고 대단항 사람 많다. 하지만 우리가 멋있으려고, 대단하려고 태어나서 사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도 태어난 김에 재미 좀 보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제일 못하고 형편없는 사람도 당당할 자격, 행복할 자격 있다.

우리 다 떡국 백 번 먹으면 죽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유능하고 권위있는 사람도 어차피 죽는다. 남들과 내면의 비교와 조롱에 수치심 느끼기에 당신은 소중하고 인생은 짧다. 게임처럼 캐릭터 다시 시작할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 가진건 나 하나밖에 없다. 답답하고 한심해도 아껴주고 잘 살자.

https://twitter.com/Ghiblibli1/status/150909654289191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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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바닥을 알고싶다면, 그 사람에게 권력을 줘보라. 역경은 누구나 견딜 수 있다. 번영은 위대한 사람만이 견딜 수 있다.”링컨이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Robert Ingersoll이라는 작가 겸 연설가가 한 말이라고 한다.하여튼 동감.잘 나갈 때 하는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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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 박사는 이걸 ‘생명줄’로 표현하더라. 특히 유아, 아동 시절에는 ‘생존’에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사랑한다고. 정인이가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듯한 마지막 순간에도 어린이집에 양부가 오자 그리고 걸어가는.. 그런 것.

아이는 부모가 주는 상처를 ‘감내’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면, 아이를 무섭게 혼내는 게 아닌, 단호하게 가르치는 방법을 택해야 하는데, 사실 어른들은 그 차이를 잘 모름. 대부분, 본인들 스스로가 무섭게 혼났지만 단호하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자라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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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을 겁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불공정 입시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노력해도 공정한 보상을 주지 않는 사회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력하면 보상을 받는다고 여러분이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가, 여러분의 노력으로 인한 성과가 아니라, 환경 덕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여러분들이 오늘 “노력하면 보상을 받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지금까지 여러분들 주위의 환경이 여러분들을 격려해주고, 등을 밀어주며, 앞에서 끌어주고, 성취해낸 것을 평가하고 칭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노력해도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사람,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사람, 너무 노력해서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력하기 이전부터 “어차피 너 따위가”, “내가 해봤자 뭘”이라며 노력할 의욕마저 꺾여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을, 부디 자기 스스로만 이겨내기 위해 쓰지 말아주세요. 축복 받은 환경과 축복 받은 능력을, 축복 받지 못한 사람들을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써주십시오. 그리고 강한 척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서로 기대며 살아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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