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부조리와 불합리함에 내가 반대의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바로잡을 어떤 다짐과 행동은 살아가는데 꽤나 중요한 부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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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부조리와 불합리함에 내가 반대의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바로잡을 어떤 다짐과 행동은 살아가는데 꽤나 중요한 부분 같다.
한 끗 차이로 갈린다는 게 그때그때 생각하기에 따라 참 쉽게 울고 웃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어렵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에이리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인간과 아주 흡사한 인조 인간 내지는 로봇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서는, 자신들이 하는 일 중에 굳이 자신들이 하지 않아도 되거나 내지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대신 하거나 보조하는데 쓰면서, 왜 인간을 창조했을 거라 생각하는 어떤 절대자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유사한 목적으로 사용하는게 아니라, 인간은 창조를 하는 어떤 고유하고 숭고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절대자가 어떤 특별한 뜻을 가지고 창조했다고 믿는 걸까? 굉장히 자만스러운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를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시리즈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역할 정도인 거 같다. 물론 재밌었다. 그치만 프로메테우스에서 깔아놓은 세계관이랄까 그 안에서 절대자 혹은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와 그 아이러니함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마주하라.
나의 딜레마는 미움받기 싫어하는 점에서 시작된다. 싫어하는 건지 피하는 건지 무섭거나 두려워하는 건지는 헷갈린다.
내가 하나의 논문에서 읽을 수 있는 만큼만 내가 쓸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논문에서 읽고 얻는 것들만 내가 써서 전달할 수 있다고 해야할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우위에 있는 듯한 친절함이나 배려를 베푸는 것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굉장히 싫다 그 느낌. 이런 류의 친절은 일단 대체로 일방적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했다기 보다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그냥 좋은게 좋은 거라는 식의 친절함이다. 그리고 그걸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이 좋거나 나아지는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이나 타인에게 내가 좋은 사람으로 인식됨이 목적인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생각해보니 꼭 개신교 신자 중에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